카시오 전자사전

2023. 4. 25. 00:48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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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수능이 200여일 남았을 무렵, 학교에서 밤 11시까지 하는 야자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껴서

1~2시간 이라도 더 공부할 요량으로 집 근처 독서실을 등록했다.

하루 종일 수업 듣고 야자하고 또 새벽 1~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자고, 아침 7시까지 학교를 가는 생활에서 새벽의 독서실 공부는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등록한 한 달 중에 안자고 공부한 날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두운 독서실 실내와 날로 더워지는 날씨, 누적되는 피로는 실로 꿀 잠을 불러왔다.



그래서 였을까... 어느 날 일이 벌어졌다. 내가 독서실에서 항상 쓰던 '카시오 전자사전'이 사라진 것이다.

공부할 때마다 항상 자리에 두고 썼었는데, 내가 엎드려 잔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가장 의심되는 사람은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었다.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이는 같았지만 학년은 한 학년 밑인 아이.

친하지도 않았고, 말도 거의 해 본 적 없는 사이.



"혹시 내 전자사전 못 봤니? 카시오 전자사전이야"



되돌아오는 대답은 '못봤다.' 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보면 당연한 대답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해서 기분 나쁠 수도 있고,

다른 누가 가져갔는지 봤는지 물어본 것이라 하더라도 괜히 엮이기 싫어서 모른다고 대답할 게 뻔하다.



독서실 실장에게 말해봐도 당시에는 CCTV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비몽사몽 간에 학교 사물함이나 집에 두고 딴 데에서 찾는 게 아닌지 싶어 다른 이를 더 의심하지 않고,

하루 중 내 손이 스치는 곳을 여기저기 찾아 다녔지만 수확은 없었다.



그렇게 전자사전을 잃어 버린 지 3일이 지났지만 다른 어디에서도 내 전자사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리면 혼날게 뻔하기 때문에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평소 전자사전을 쓰다가 두꺼운 종이 사전을 펼쳐야 하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쌓여가는 불편함 만큼, 전자사전을 훔쳐간 이가 옆자리 그 놈일 거라는 심증만 커져갔다.



'또 가서 물어봐야 하나? 어차피 또 모른다고 할 거 같은데...'



입장을 바꿔서 내가 '전자사전을 훔쳐간 그 놈'이라고 생각하고 왜 가져 갔을까를 생각해 봤다.

공부하려고?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원래 공부를 열심히 하는 놈은 아니었다. 학교 근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며 불량한 애들과 어울리던 그 놈의 낯짝을 생각하면 할수록 공부를 할려고 남의 전자사전을 가져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때에는 한 반에서 전자사전 쓰는 학생이 채 2~3명도 안되었을 때라 (2000년대 중반, 당시 내 전자사전은 20만원이 좀 못 되는 가격 이었다.)



공부를 안 하던 놈이 공부를 한다고 전자사전을 꺼내 놓고 쓰면 주변에서도 이상하게 여기고 다 알려질 판이었다.

그렇다면 내 전자사전을 가져간 이유는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 돈으로 담배도 사서 필 수 있고, PC방도 갈 수 있을테니까...



당시에는 지금처럼 당근이나 네이버 중고나라가 있던 시절은 아니었다. 대신에 '옥션 중고거래' 에서 쓰던 물건을 팔고 구매하던 시기였다. 또 지금은 모바일 카카오톡/PC 카톡을 쓰는 시대이지만, 그 당시에는 네이트온,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쓰던 시절 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그 놈'의 네이트온 아이디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옥션에서 '그 놈'의 아이디로 검색을 해보니 내가 쓰던 모델명의 '카시오 전자사전'이 버젓히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 팔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심증에 이어 물증까지 확인하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했다.

우선 판매 글을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으니, 캡쳐해서 출력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심증, 물증 모두 있더라도 정작 전자사전은 여전히 '그 놈' 손 안에 있는 상황.

여차하면 어디다 숨기거나 버려버리고 모른다고 하면 잡아 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 쪽에서 섣불리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선생님이나 경찰에게 알려서 일을 키우는 것도 '고3' 이었던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일을 키우지 않고, 내 전자사전을 '확실히' 되돌려 받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일을 부탁할만한 사람이 생각났다. '전교 회장'



당시, 전교 회장이던 K는 중학교 때에는 싸움짱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평소에도 여러 그룹의 친구들과 잘 어울렸으며, 리더십이 강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전교 20위 권에 들 정도로 잘했고, 그래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 하고도 두루 두루 잘 지냈던 친구였다. 그래서 평소 껄렁껄렁한 애들도 전교회장 말은 잘 들었고, 교내에서 영향력이 큰 친구였다.



나는 전교회장 K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출력한 옥션의 페이지까지 넘겨주고 전자사전 건을 부탁했었다.

K는 걱정말라며, 자기가 꼭 받아다 주겠다고 하고는 몇 시간 뒤에 전자사전을 받아다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아이스크림을 만원 치 사서 전교회장 K와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나눠 먹었던 게 기억이 난다.

이후, 대학에 와서는 그 전자사전은 잘 안 쓰게 되어 중고로 팔아버렸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을 돌이켜 보면 아찔하면서도 통쾌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내가 명탐정 코난이 된 것 같은 - 물론 살인사건은 아니지만...



며칠 전 오사카를 다녀와서 아직도 전자사전을 파는 일본의 전자제품 매장을 방문하고 나서 전자사전에 대한 나의 옛 추억이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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